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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 : 일상속내생각

사랑하는 나와는 많이 다른 동생

by 멍뭉미안녕 2020. 10. 8.

 

 

  연년생으로 태어난 형제는 날아오는 주먹을 잘 피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는 말이 있다. 사실 내가 지었다. 특히 나는 어렸을 때 이 특성을 가질 수 있었는데, 이 특성은 일년 차이로 태어난 동생이 나와는 너무나도 달라서, 덕분에 특수하게 얻게 된 특성이다. 꽤 많은 연년생 형제들이 그랬듯이 어릴 때부터 나와 동생은 정말 많이 치고 박고 싸웠다. 유혈상태도 몇 차례 있었을 정도다. 하지만 이 전쟁에서 영향을 끼치는 몇 가지 특별한 문제점이 있었다. 정말 큰 특이점이라 지금 내가 이렇게 아무 탈없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 감사하게 느껴지는데, 문제는 즉 이렇다. 내 동생은 초등학생 때, 전교에서 싸움을 제일 잘하는 사람에게 붙여주는 호칭. 즉 전교 일짱이었다. 미친거 아닌가. 나는 그냥 태어난 것일 뿐인데 내 동생이 전교 일짱이라니 드럽게 운이 없다. 전국에 초등학교 몇 개지. 대략 6,000개 정도라고 들은 기억이 나는데, 그렇다면 통계상 내 동생은 전국적으로 랭커다. 거기에 나는 반대로 억울하게도 몸이 허약하게 태어나서 매우 마르게 태어났고, 힘이란 것이 존재할까라는 생각이 드는 팔뚝을 가졌었다. 지금도 마른 몸매이지만, 그 때는 더욱 안쓰러웠다. 반면에 동생은 키는 크지 않았지만, 꽤나 퉁퉁한 몸매를 가졌었다.

그리고 이 문제와는 반하는 또 다른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이런 크나큰 악조건에서도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가 있었는데, 바로 가부장적인 김씨 집안이었다. 가부장적인 집에서는 분명한 서열이 존재하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형은 형이고, 동생은 동생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형은 무조건 동생보다 위에 있어야 하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그래서 이러한 조건 때문에 믿지 않을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동생에게 질 수 없어서 끝까지 덤벼 동생 위에 있어야 했다. 그래야만 했다. 나름 착한 동생이 여러 차례에 나를 봐줬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참 퍽퍽한 유년생활을 보낸 것 같다. 흑흑.

 

동생과는 청소년이 되어도 다른 길을 계속 가게 되었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지극히 평범한 중, 고등학생 시절을 보냈다. 기껏해야 축구, 피시방에만 전전하는 아주 지극히 평범한 청소년. 친구들도 지금 만나는 친구들과 다르지 않아 아주 착한 친구들과 어울렸다. 하지만 동생은 날개를 달기 시작했다. 흡연은 기본, 고등학교 아니 우리 시에서 알아주는 일진이 되었다.

나는 보통 ‘승만이네 형’으로 알려졌고, 그러다 보니 분명 나는 모르는 후배들인데 나에게 인사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학교에서 급식 먹으러 오가는 중에서는 저~쪽에 모여있는 여자 후배들이 “쟤야. 쟤가 승만이네 오빠야” 라고 하기도 하였다. 괘씸한 것들. 쟤라니.

 또, 이런 동생 덕분에 집에서만 만나는 엄마가 학교에 자주 오기도 해서 같이 하교를 하였던 특별한 기억도 있다.

 

 

나와 동생은 그렇게 같은 환경에서 다르게 컸다. 청소년기를 졸업하고 내가 군대에 있는 동안, 동생은 기어코 등에다가 귀여운 용을 키우게 되었고 한동안 우리집은 이 것 때문에 꽤나 차가운 칼바람이 불기도 했다.

 

같은 환경에서 자랐는데 어쩜 이렇게 다르게 컸을까? 최근 엄마랑 곱창을 먹다가 이 이야기가 나왔다. 그래서 또 다시 나는 이 문제에 대한 잠정적 결론 게임을 시작하였다.

 

 

우리는 같은 환경에서 자랐지만, 다른 역할을 부여 받았다. 앞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우리 집은 꽤나 가부장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그래서 항상 차별이 존재했고, 모든지 형부터 대우를 받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래서 아마 동생은 공정하지 못하다고 느꼈을 것이고 크나큰 열등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열등감은 보다 더한 관심을 일으키기 위한 행동으로 이어질 것이고, 이에 동생은 행동의 수위를 높여간 것이다. 또 그러다 보니 행동의 수위가 높은 친구들과 만나 그들만의 공동체가 형성 될 것이고 그 것이 동생의 모습이 된 것 같다.

또, 나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나도 형의 역할에 갇혀있다 보니, 조금은 착해야 했고 동생에게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어릴 적 동생이 팽이치기를 하러 나갈 때, 나는 형의 역할로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느꼈고, 그래서 부모님이 좋아하는 행위를 찾아나섰다. 그래서 칭찬받기 위해 다섯 살, 여섯 살 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다. 확실히 부모님은 좋아하셨고, 또래보다 한글을 빨리 깨우친 나에 대해 더 큰 욕심을 품기도 하셨다. 하지만 분명히 나도 동생에 대한 열등감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꽤나 날 것의 모습인 동생은 참 매력적인 구석이 있었고, 그래서 친척, 아빠친구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착하기만 했던 나는 그런 매력은 조금 덜했다. 나는 동생과 비교해서 솔직하지 않은 태도를 함양하게 되었다. 그래서 더욱 동생에게 착해지기를. 평범해지기를 요구했던 것 같다. 자 일단 이게 내가 내린 잠정적 결론이다.

 

 

 

지난 이야기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잘 컸다. 다행히도 우리 부모님은 사랑을 주는 방법을 아는 분들이었다. 정말 사랑을 많이 받았고, 가부장적인 분위기에서 아버지란 역할을 배운 우리 아빠는 희생의 아이콘이 되어, 희생으로서 사랑을 표현하셨다. 고지식하고 표현이 부족하지만 분명히 보이지 않는 사랑을 듬뿍 주셨다. 그 것은 나와 동생의 양심을 키우게 하였다. 그래서 현재의 우리가 되었다.

 

 

 하지만 역시 역할에 집중해야 하는 우리나라 문화는 조금 고민이 든다. 이런 문화에서는 역할만 잘 수행하면 유기적으로 잘 굴러가는 집단이 되지만 다양성이 포기되어, 개인적이기가 어렵다. 형제 역할에 집중하지 않고 나는 나대로 동생은 동생대로의 캐릭터를 잘 반영해주고 지지하는 가정에서 자랐다면 우리는 어떻게 컸을까? 궁금하다 그런 집안에서 자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

 

애니웨이 지금도 나는 동생이 참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날 것의 모습을 참 잘 유지한다. 그래서 좋다. 해주고 싶은 것도 많으면서도 조금 더 독립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내 행동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집 계단에서 담배는 그만 폈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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