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클랜드 대 도시를 떠나, 마운트 망가누이라는 휴양지에서 새로운 워홀 라이프를 시작하였다. 오클랜드에서 만난 친구들을 만나지 못하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나의 워홀의 목적은 뚜렷하였기 때문에,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고 낯선 곳으로 떠났다.
새롭게 방문한 곳은 바다와 산이 접해 있으며, 매 여름 서핑하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아름다운 휴양지였다.
아름다운 도시에서 새로운 일상을 보낸다는 설레임과 또 다시 혼자라는 걱정이 함께 피어 올랐다. 걱정이 피어 오를 때는 고민보다 움직이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다. 나는 도착하자 마자 게스트 하우스에 머물며 새롭게 머물 장기투숙이 가능한 집을 구하기 위해 움직였다. 이 과정이 조금 특별하다. 보통 워홀러들은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할 때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집을 구한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마음에 드는 숙소가 없었다. 컨디션이 좋은 곳은 있었지만, 끌리는 곳이 없었다. 그리고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우연히 대형 마트에 아이스크림과 아침에 먹을 우유를 사러 갔다가 안에 있는 로컬게시판을 보게 되었다. 게시판에는 이 동네의 다양한 오프라인 정보가 붙어있었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햝으며 정보를 발견한다는 느낌보다는 구경한다는 느낌으로 슬슬 훑어 보았는데, 그 중 홈스테이 정보가 있었다. 가격도 착하고 위치도 좋았다. 나는 벽보를 보고 곧바로 연락하여 어느 노부부 가정집에 방문하였다. 처음 만난 노부부는 에너지틱 하면서도 누가 봐도 사람 좋은 듯한 인상을 풍겼다. 노부부는 알아듣지 못하는 나에게 참 많은 것을 설명해주었지만, 나는 나의 필살기인 아무 것도 몰라요. 표정으로 오케이 오케이하고 일사천리로 계약을 하였다. 나에겐 홈스테이라는 경험으로 이 집을 고르는 이유는 충분했다. 하지만 진짜 행운은 따로 있었다. 그 것은 바로, 이 곳은 이 동네에서 현지사람들이 모이는 커뮤니티 공간이었다는 것이었다. 매일 밤이 되면 동네 주민들이 이 집에 있는 한 커뮤니티 공간에 방문하여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며, 시끌버쩍 대화를 나누었다. 진정한 로컬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역시는 역시 이런 커뮤니티 공간을 내주는 사람들은 나이스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정말 그랬다. 로리와 로버트, 노부부는 너무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나는 운 좋게 저렴한 가격에 홈스테이를 할 수 있었고, 영어공부라는 목적 아래 하루에 한 시간은 미리 가져온 영어 교재로 영어공부를 하고, 저녁이 되면 그 사람들이 있는 공간 한 켠에 앉아 들리지도 않는 대화를 추측하는 것이 나의 일상이 되었다. 거기 있는 사람들은 나에게 많은 것을 물어보았지만, 나는 순수한 눈빛을 보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매일 밤 그 공간에서는 다양한 대화로 무르익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나는 이 집에서 세 달 동안 머무르게 되었는데, 세 달 동안 이 공간에서 머무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이 사람들과 이질감이 많이 줄어들게 되었다. 사람들에게도 내가 특별한 존재가 아니게 되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달랐다. 많은 다른 점이 존재하고, 그 사람들은 그 것을 신기해 하면서 나에게 너는 참 다르다고 표현하였다. 예를 들어, 나는 매일 또는 이틀에 한 번 샤워를 하였는데, 여기 사람들은 그 걸 이상하게 생각했다.
“너 왜 맨날 샤워해? 물 낭비야”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음 어. 당연한거잖아.. 여기 있는 사람들은 잘 씻지 않았고, 그 덕분에 화장실은 항상 깨끗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또는 나는 이 사람들에게 투머치 카인드한 사람이었다. 나에게 친절하고 예의 바르다는 이야기를 했다. 모두가 TV를 보고 있을 때, 그 앞을 지나가면 당연히 빠르게 지나가거나 ‘SORRY’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인지상정이지 않나? 하지만 한 친구는 이해 안 간다는 듯이 나를 흉내낸다. 샤이한 모습으로 SORRY라고 말하며 지나가는 모습을.
그리고 자신들의 버전으로 다시 보여준다. 어깨와 허리를 펴고 ‘Fuck you’라고 하면서 지나간다.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이건 진짜 내가 사회복지사가 되기 전이라 참는거다. 사회복지사였으면 불꽃 튀는 토론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친구들은 가끔씩 날 위해 유치원생과 대화하듯 차근차근 정확한 영어문장을 구사하며 대화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덕분에 나는 그 사람들이 살아 온 삶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노부부 중 로버트는 이 전에 요리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지금은 은퇴했다. 또한, 인도네시아를 다녀 온 이야기를 자주 해주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원숭이의 뇌를 먹어 본 경험에 대해 술에 취할 때마다 해주었다. 아. 매일 취했으니 매일 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그리고 이 집에는 한 커플이 더 살았는데, 이 커플은 조금 남다른 이력을 가지고 있다. 이 커플은 지금은 함께 살지만, 결혼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리고 여자가 돌싱이며, 일곱 살짜리 아이가 있었다. 나는 일곱 살인 사라와 자주 같이 놀았다. 슬프게도 이 일곱살 친구와도 대화가 통하지 않아서, 이 친구가 참 답답해 했다. 야 나도 답답해. 그리고 이 친구는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지만, 솔직히 못 불렀다. 아이라서 칭찬해 준거야. 그 밖에 많은 이웃들이 이 곳에 방문하였다. 너무 많아서 모두 설명하기 힘들지만, 다양한 사람들이 왔고, 나는 그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 그들이 사는 집도 놀러가 보고 낚시도 하기도 하였다. 말은 잘 안 통해도 다정했던 이 친구들 덕에 불안감을 잊은 채 어울릴 수 있었다.
이 공동체가 조금은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연령대가 다양하다는 것이었다. 이웃이라는 이름으로 노부부부터 내 또래까지, 아니 일곱 살 어린아이까지 쉽게 어울리며 화끈하게 대화를 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정말 매일 만나는데 매일 할 말이 생긴다. 얼핏 보면 토론같이 느껴질 정도로 열심히 이야기한다.
이 사람들은 할아버지, 할머니, 나이에 따른 역할을 구분이 없었다. 오롯이 개별적인 존재로 여겨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늙고, 어리지만 그저 그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 안에 그 사람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처럼 아빠의 역할, 엄마의 역할의 구분이 필요없었다. 역할보다 사람에 집중하다 보니 다채로움이 공존하는 공동체가 유지가 되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공동체가 존재하면 어떨까? 장단점이 있겠지, 하지만 적어도 세대간 단절이 일어나 외로운 사람들이 많아지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그리고 오랜만에 보고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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