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 일상속내생각

뉴질랜드 워킹홀리데이에서 내가 떠올린 것들 3 _ 동생이 왔다!

멍뭉미안녕 2020. 10. 14. 15:30

 

 

  워킹홀리데이 약 6개월 차. 내 하나뿐인 동생이 뉴질랜드로 여행을 온다고 했다! 동생은 스무 살 이후로 대학을 가지 않고 곧 바로 일을 시작했기 때문에, 나처럼 공부 핑계로 마음의 여유를 가진 적이 없었다. 내가 틈틈이 해외여행으로 현실을 도피하였을 때도 동생은 묵묵히 사회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과정은 잘 모르겠지만 부모님과 대화를 하다가 형이 있는 뉴질랜드로 열흘 동안 여행을 가보라는 이야기가 나왔고, 동생은 정말로 내가 있는 뉴질랜드로 왔다.

 

어 뭔가 괜히 설렜다. 동생이랑 내가 있는 이 뉴질랜드에서 열흘을 보내다니. 생각지도 못한 특별한 이벤트가 생긴 거다. 동생이 뉴질랜드에 오기 위한 준비를 하는 동안, 나도 동생과 특별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하루하루 여행계획을 세웠다. 그 동안 모아둔 돈도 있겠다. 짧고 굵은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동생은 해외가 처음이라 상당히 무서워 했고, 내가 있는 곳도 대도시에서 5시간 정도 떨어진 곳이었기 때문에 대도시에 사는 친구에게 동생이 이 곳으로 잘 올 수 있도록 안내를 부탁했다. 그리고 동생이 정말 뉴질랜드에 떨어졌다.

동생이 내가 있는 곳으로 도착한 날, 나는 일을 끝내고 일찍이 동생이 내리는 버스정류장이 보이는 조금 떨어져 있는 벤치에 앉아 동생을 기다렸다. 곧 동생이 버스에서 큰 캐리어를 가지고 내렸고, 동생은 계속 두리번 두리번 거리며 불안해해 했다. 나는 키득대며 그 모습을 즐겨 보았다. 나는 동생 앞으로 갔고, 동생은 우는지 웃는지 모를 표정을 하며 왜 이렇게 늦게 오냐고 화를 냈다. 상당히 무서웠나 보다. 고등학교 일찐 출신도 역시 별거 없다. 그러고 우리는 가까운 바닷가가 보이는 피시앤 칩스 식당을 갔고, 가는 동안 동생은 뉴질랜드에 도착해서 나한테 오기 까지 얼마나 많은 무서운 일?이 있었는지 설명했다. 그 무서운 일은 너무너무 웃겼다.

 

동생은 뉴질랜드에 도착하는 순간 휴대폰의 밧데리가 나갔다고 한다. 그 때부터 불안 초조가 마음 속에 피어나기 시작했고, 내가 미리 섭외한 친구를 만나기 위해 오클랜드 시내 한복판에서 한국인을 찾아 다니며 헤맸다고 하였다. 결국 한국인을 만나 휴대폰을 충전하였고, 내 친구에게 연락이 닿아 겨우 만났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후로, 지친 마음으로 내가 미리 잡아 놓은 게스트 하우스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같은 방을 쓰는 외국인들이 인사할 때마다 너무 무서워서 90도로 인사하면서 hi, hello를 외쳤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불안한 마음으로 내일이 빨리 오기를 고대하면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갑자기 침대가 계속 흔들렸다고 했다. 그래서 아래를 내려다 보니 왠 외국인들이 뜨겁게 사랑을 나누더란다!! 그 것도 세 시간 넘게!! 동생은 흔들 침대에서 세 시간 동안 엄청나게 초조해 했고 그 무지막한 외국인 남성인의 파워에 두 번 세 번 쫄리며 밤을 지새웠다고 했다. 동생에게 백인우월주의가 그렇게 생겨났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너무 웃겨서 피시 앤 칩스를 먹지 못하고 내내 울면서 웃었다. 동생의 격분은 가라앉지 않았고, 계속해서 외국인들은 미친놈들이라고 욕을 했다. 와  짧은 1박 2일 동안 이런 경험을 겪다니 한 편 부러웠다. 내가 동생이었다면 이 글 소재는 더더욱 생동감 있었을텐데 히히. 또 한 편으로 세 시간 동안 흔들 침대라니. 지옥이 따로 없었을 것 같기도 했다.

 

“아니ㅡㅡ 욕을 해야지 욕을. 니가 제일 잘하는게 욕 아니냐. 등에 문신 왜 했냐. 바로 웃통 까고 fuck fuck 외쳤어야지.”

“형 말도마. 그렇게 세 시간동안 하는 놈은 싸워도 이기지도 못할거야.”

 

그렇게 우리의 뉴질랜드 여행이 시작되었다. 나는 내가 사는 집으로 데려가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 동생을 소개했고, 밤마다 같이 술을 마셨다. 노리는 동생이 온 기념으로 뉴질랜드 전통음식?인 칠면조 요리를 해주었고, 마당에 불을 피워 고기를 구워먹기도 했다. 동생은 영어를 못하지만 특유의 밝은 태도로 맥락에 알맞은 영어 단어 언급하며 모두를 웃게 하였다. 영어를 못해도 이렇게나 잘 통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리고 나도 항상 혼자 있다가 동생이 오니 한 결 마음도 편하기도 했고, 더욱 신났다.

 

나는 동생이 온 이후로도 며칠 간은 일을 빼지 못했는데, 그 동안 혼자서 바닷가도 다녀오고 카페도 가보라고 했지만 동생은 무섭다며 내가 오기 전까지는 방에서만 지냈다. 진짜 덩치만 산만하다 쯧쯧 한 소리하고 나는 일을 다녀왔다. 그리고 일이 끝나면 근교로 동생과 여행을 다녔다. 등산을 하기도 하였고, 온천도 갔다. 특히, 자연온천을 다녀왔는데 산에서 뜨거운 물이 흘러 내리는 거에 대해 나와 동생은 매우 감격하며 옷을 벗고 계곡 물에 들어가 신나게 놀았다. 아 사진을 못 남겨 놓다니. 그리고 일을 4, 5일 정도 뺄 수 있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동생과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우리는 세계 3대 간헐천인 로토루아도 가기도 하고 뉴질랜드의 부족이었던 마오리족의 전통문화체험도 했다. 나와 동생은 아이처럼 좋아했다. 한 번은, 8시간 하이킹 체험을 신청하였으나, 날씨 문제로 오르지 못하게 되었고 나와 동생은 스쿠터를 빌려 가까운 폭포를 보고 오기로 했다. 여기서 내가 철부지 짓을 좀 했는데, 베스트 오토바이 드라이버인 동생을 놔두고 내가 운전해보겠다고 했다가 빗물에 미끄러져 고속도로에서 넘어졌다. 나와 동생은 엄청나게 고통스러워했지만, 특히 내가 너무 아파했다. 뒤에서 오던 차들은 우리를 보고 차를 세워 괜찮냐고 묻기도 했다. 우리는 결국 다시 도시로 돌아왔고, 주말이라 병원이 열지 않아서 간단한 응급처치만 하고 쉬었다. 동생한테 쌍욕을 먹었고, 나는 받아들였다…… 또 한 번 터진 무모함. 반성 반성.

 

나와 동생은 여행을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생각해보니 내가 한국에 있을 때도 각자 군대에 있었기도 했고, 내가 대학교에 다니면서 지방에서 자취를 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늘 떨어져 있었다. 스무 살이 넘어서는 이렇게 길게 대화를 나눠보지 못했다. 사실 미안한 이야기지만 내 이십대 초반 생활은 새로 만난 친구들과의 시간이 너무 재미있었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지도 못했다. 우리의 밤은 술과 함께 보냈는데 알코올 농도가 짙어질수록 그렇게 그렇게 우리의 대화는 깊어졌다. 그 동안 동생은 부모님의 일을 많이 돕기도 하고, 새로운 일을 했는데 그렇게 일찍이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어느 순간부터 돈에 집착하게 되었다고 했다. 모든 감정과 생각이 돈으로 귀결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면서 너무 힘들었다고 엉엉 울기도 했다. 너무 미안했다. 나는 나 대로 즐기면서 지내고 있었고, 하고싶은 것들 것 누리면서 살고 있었는데 동생은 그 시간을 하고싶은 일보다는 해야만 하는 일로 채우고 있었다.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어떻게 이야기 할지 몰랐었다. 이십대를 더 즐기고 다양한 경험을 쌓아보라는 말은 동생에게 닿지 않았다. 눈물과 하소연이 범벅이 되면서 그렇게 그렇게 우리의 여행은 끝나가고 있었다.

 

동생이 뉴질랜드를 떠나는 날, 역시 나는 무심한 태도로 조심히 돌아가라는 말과 함께 장난스러운 태도로만 일관했다. 마음 한 편이 무거웠지만, 그만큼의 장난만 전할 뿐이었다. 그리고 동생이 뉴질랜드를 떠나 집으로 돌아갔다. 동생이 떠난 자리는 공허하면서도 무거운 마음이 공존했다.

 

 수년이 지난 지금도 동생과 나는 가까이 살고 있고, 그 때와는 별 다르지 않은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가끔씩 만날 때마다 그 때보다는 나은 태도로 동생의 말을 들어주고, 나름의 생각을 전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길을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작년, 동생이 결혼할 때 약 4장과 백만원을 전했다. 그 편지 안에는 아직도 좋은 형, 좋은 친구가 되어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을 담았다. 그 이후로도, 소소하게 마음을 전하지만 과연 동생에게는 어떻게 닿고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