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뭉미안녕
2020. 9. 10. 14:37
우리 룰
친구들과 항상 꺼내는 단어가 있다.
"우리 룰"
즉, "우리만의 규칙"
나와 친구들은 고등학생 때부터 시작한 사이로, 벌써 10년 이상 만난 친구들이다. 인원 수는 총 8명이다. 그리고 다른 남자 또래들의 친구 사이에 비해 꽤 돈독한 편인 것 같다. 나는 이 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를 심심풀이 땅콩으로 고민해보았고, 그 이유를 "우리 룰"로 꼽았다. 우리는 모이면 자주 이 단어를 외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아 안돼 안돼. 너 이거 무조건 해야돼. 우리 룰이야. 지켜"
"아! 우리 룰. 우리 룰."
지금 글로 옮겨 적다 보니 소름 끼치게 유치하다. 이 친구들이랑 함께 외칠 때는 아무런 느낌을 못 받았는데 제 3자 입장으로 쓰려니 너무 유치하다. 으..(벌레보는 느낌) 뭔지 감이 오는가? "우리 룰" 은 말 그대로 우리만의 규칙이다. 우리는 10년 이상 친구라는 관계를 유지해오면서 몇 가지 규칙을 세웠다. 우리 룰 몇 가지를 소개한다.
먼저 생일 챙기기다. 다른 무리들과 비슷하면서도 조금은 특별한 생일 챙기기를 한다. 우리는 생일 당사자의 생일에 '~DAY' 라는 명칭을 달아준다. 만약 삼룡이의 생일이면 '삼룡DAY'. 그리고 그 생일에는 웬만하면 모두가 필참한다.
'삼룡DAY'의 매력은 따로 있다. 삼룡DAY의 삼룡이에게는 그 날 나머지 친구들에게 무한정 베풀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돈 쓰는 날이라는 것이다. 좋든 싫든. 누군가에겐 가혹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일 년에 한 번 많은 돈을 쓸 수 있는 기회를 장려한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이 날은 돈을 쓰는 만큼 삼룡이가 하고 싶은 컨텐츠로 채울 수 있다. 친구들은 무조건 따라야 하는 조금은 강제적인 면이 존재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럼 우리가 그 동안 해 온 이력을 이야기 해 볼까? 내 생일에는 다 같이 실내 암벽등반을 한 뒤, 따릉이를 타고 남산을 올랐다. 친구들이 싫어하는 모습에서 희열을 느꼈다. 또 다른 친구는 캠핑을 준비한다. 특히 무조건 1박2일 충이 있는데, 그게 부담이 되어서 당일치기만을 희망하는 친구들도 무조건 따라야 하는 고충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이 과정 또한 생일자가 모두 준비해야 한다. 대학 MT를 기획하듯 하루를 책임있게 준비해야 한다. 또 다른 친구는 단체 프로필사진을 제안하기도 했다. 단순 술만 마시고 끝나는 경우도 있지만, 이렇게 다양한 컨탠츠로 우리의 생일이 채워진다. 일 년에 여덟 번의 생일. 우리는 여덟 번의 생일을 모두 특별하게 보낸다.
두 번째는 게임이다. 서른이 되니 자연스럽게 대화가 줄어들더라. 마치 부모에게 독립하고 친구들에게도 독립하는 순간이 온 듯이, 각자에게 더 중요한 일들이 생기는 것 같다. 우리 에게도 ‘일상에서 풍부한 대화를 이끌어 낼 만한 것’이 필요하더라. 더 생산적이고 의미있는 대화 거리가 우리에게 생겼으면 좋았겠지만, 그 것이 우리는 보통 피파 온라인이란 축구 게임이었다. 다행히 우리 모두는 축구라는 스포츠를 많이 좋아한다. 정기적으로 축구를 하기도 한다. 아무튼 그 축구게임 안에서 또 우리만의 작은 룰을 생성하여, 정기적으로 서로의 유닛(선수)를 뺏고, 팀을 교체한다. (원래 이런 게임이 아니다.) 이는 장기적으로 게임을 할 수 있도록 촉진하고, 일상에서 줄어들 수 있는 의사소통의 기회를 늘려주었다. 우리는 피파 온라인으로 한 달 동안 아니 몇 개월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그 것도 매우 진지하게. 더 웃긴 건 가끔은 감정도 상한다. 게임 때문에. 우리는 술을 마시면서 피파 온라인 안에서의 우리 룰에 대해 심도있게 토론한다. MBC 백분토론? 우리가 더 진지하다.
다른 사람들이 이 글을 보면 어쩌면 철없고 순수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너무 유치하게만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보다 우리가 삶에서 필요한 것은 유치하고 사소한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순수한 작은 약속들이 친구들 과의 이십대와 삼 십대 초반을 풍요롭게 만들었다고 확신한다. '우리 룰'의 파생효과로 우리는 여행도 자주 가고, 얼굴을 마주하는 시간도 많아진 것 같다. 친구들의 여자친구들은 이 친구들에게 의문을 제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이 먹어가면서 이렇게 좋은 현상을 보기 쉽지 않지 않은가?
우리는 우정이라는 단어보다 ‘우리 룰’ 이라는 단어를 사용 함으로서 우정이라는 낯 간지러운 단어에 너무 귀속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이 안에서도 적극적인 친구가 있고, 소극적으로 참여하는 친구도 있다. 하지만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의 분위기가 유지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앞으로 '우리 룰'은 점차 힘을 잃고 각자의 일상에 집중할 수 밖에 없는 시기가 오지 않을까? 그렇기 때문에 사사건건 따지고 들 수 없다. 현재가 중요하고 자발적인 참여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문화심리학 김정운 교수가 이야기했다. 인생에 'ritual'이 많을수록 행복하다고. ritual은 의식, 정기적인 행사이다. 어릴 때 우리가 빼빼로 데이, 발렌타인 데이를 잘 챙겼었던 것처럼. 그런 작고 사소한 이벤트가 많을수록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한다. 나이 먹을수록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가는 것도 ritual의 부재의 탓이 크다고 한다.
내가 생각해도 공감되는 맥락이다. 나는 가족의 생일이나 기념일도 잘 챙기는 편인데, 확실히 ritual이 있는 삶이 그동안 살아 온 날들의 쉼표가 되어 주기도 하고, 고마운 감정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의식적으로 중간 중간에 마디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앞으로 나는 더 다양하고 재밌는 ritual을 만들어 내는 것을 시도하고자 한다. 더 재밌는 삶을 위해서.